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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위안부, 내 존재가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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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연주 기자
기사입력 2019-04-08

 

 

 

 

 

 

 

 

 

 

 

 

 

 

 

 

 

 

 

 

 

 

 

 

 

 

 

 

 

[뉴스쉐어=양연주 기자]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독립투사의 희생과 더불어 또 하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안부’라 불리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입니다.

 

피해 할머니들은 당시 13~19세 어린 나이에 위안소로 끌려왔습니다.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말에 속아서, 혹은 ‘신사참배를 안 한다’는 빌미로, 또는 ‘마을에서 처녀를 공출한다’는 무자비한 명분 등,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결국 목적은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학순 (1924년 10월 20일 출생. 서울에서 생활하다 1997년 12월 16일 사망)

17살 중국 화북지방의 후어로 현 철벽진에 있는 일본군 부대의 위안소로 끌려간 김학순 할머니. 일본 이름 ‘아이코’라 불리며 하루에 10~15명의 일본군인을 상대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우리에게 보상하고 이 일을 역사에 남겨야 한다. 오늘날 일본과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야만 한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중에서-

                                                                           발췌 : 기억하겠습니다

 

노창자 (1922년 2월 16일 출생, 충남 보령에서 생활, 2004년 8월 23일 사망)

17살 봄, 일본인이 처녀들을 데리고 간다는 말에 큰어머니 집으로 도망가다 붙잡혀, 중국 톈진의 산시성 최전선 부대 근처 위안소로 끌려갔다는 노창자 할머니. 판자로 만든 위안소 7호실에서 2년 3개월 동안 매일 30~40명의 일본 군인을 상대하며 폭력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일본 정부는 강제적으로 동원한 증거가 없다고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하지만 내 존재가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솔직하게 죄를 인정하고 빨리 보상을 해야 한다.”

                                                                          -노창자 할머니의 증언 중에서-

                                                                            발췌 : 기억하겠습니다

 

심미자(1924년 2월 4일 출생, 경기도 성남에서 생활 2008년 2월 27일 사망)

열여섯 살 5학년 때 일본인 선생님으로부터 수를 놓아 일본 지도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심미자 할머니. 벚꽃이 아닌 나팔꽃을 수놓아 일본 지도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수업 중 경찰서로 끌려가, 전기 고문을 받고 눈을 떠보니 후쿠오카의 위안소였다고 합니다.

 

“내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나쁘지 내가 나쁜 것이 아니다. 일본이 우리에게 나쁜 짓을 했다고 양심적으로 사죄하기 바란다. 일본 젊은이들에게 일본군에 의해 감금당하고 폭행당했던 우리에 대한 것을 교과서에 싣고 가르쳐야 한다.”

                                                                         - 심미자 할머니의 증언 중에서-

                                                                            발췌 : 기억하겠습니다

 

박영심(1921년 12월 15일생, 중국에서 생활, 2006년 사망)

고향에서 일본인 순사에 의해 중국 난징에 있던 위안소로 끌려 왔다는 박영심할머니. 연합군의 공격을 받으며 방공호로 도망친 상황에서도 하루에 30~40명의 병사들을 상대 했다고 합니다.

 

살기 위해 도망쳤다는 박영심 할머니는 중국군에 잡혀 일본군과 함께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고 하는데요. 수용된 지 7개월 후 김구선생이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인도 후 1946년 2월 인천을 거쳐 북한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 중에서-

                                                                          발췌 : 기억하겠습니다

                                   

피해 할머니들은 아직 제대로 된 보상도,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 보상을 위한 집회를 합니다.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일본의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 배상을 외칩니다.

 

지난달 31일 대구에 살던 또 한명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가 97세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 240명 중 생존자는 21명으로 줄었습니다. 생존자 21명의 평균 나이는 91살.

 

더 늦기 전에,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와 법적인 보상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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